2018년 6월 20일 수요일

윤슬 단편선

    1
  • 418 휴대용 윤슬◆xhi8jXco.Y (773626E+54)
    2018-06-14(거의 끝나감) 19:13:26 <9981940>
    무심코 하늘 위를 올려보았다. 구름이 뭉쳐 생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탓에 어두웠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구름의 가장자리, 커다랗게 뭉친 구름의 끝, 구름과 하늘의 경계선.

    그곳의 구름은 햇살을 받으며 제 본래의 순백을 뽐내었다. 정말 예뻤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리고 문득, 파도가 떠올랐다.

    저 먼 바다에서 시작되어 해안가까지 밀려오고 모래와 바다의 경계인 모래사장에서 무너지며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새하얀 파도가.

    문득, 바닷가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거품에 발을 적시며 물놀이를 하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아련한 기억에 빠져들며 미소를 지었다.

    아아, 바다의 파도에 발을 적셔봤으니, 하늘의 파도에도 발을 적셔보고 싶다.



    -윤슬의 일기 2018년 6월 14일 中 마지막 문단
  • 2
  • 744 휴대용 윤슬◆xhi8jXco.Y (1919289E+6)
    2018-06-15(불탄다..!) 19:19:07 <10002814>
    꿈에서 나는 나쁜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친구들이 건내주는 칼을 그 사람에게 휘두르고, 긋고, 찌르고, 긁었다.

    처음엔 미안했지만 억지로 했다.

    친구들이 좋아하했으니까. 친구가 좋았으니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이 꿈이 가능한한 길게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어도 좋다. 아프고 괴로우며 고독한데다가 슬픈 현실 따위 필요없었다. 이 꿈이 계속 이어지기를, 꿈 속의 친구들과 함께 있기을 바랄 뿐이었다.

    그 사람은 몇 번이고 이러지 말라며,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며 몇 번이고 호소했다.

    아플텐데도 조금의 내색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걱정하며 말리려 하는 그 모습에 나는-

    -재미가 들렸다.

    현실의 그녀석들이 날 왜 괴롭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은 어떤 반응일지가 궁금했다.

    내가 준 상처는 금방 회복했지만, 그래도 그 상처회복이 지치는 것인지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사람은 죽었다.

    그 시체를 보며 아쉽다는 듯 혀를 다시는 내게 친구 중 대장격인 친구가 다가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성녀를 죽인 기분은 어때?"
    "더 놀지 못해서 아쉬운데."

    내 말에 친구는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시끄러워."
    "아, 미안미안."

    그는 웃음을 거두고 친근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우리"
    "이제 너희는 나"

    내가 답하자 그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즐거움이 우선이라."
    "우리의 힘은 그를 위함이니"
    "마음껏 남용하여 미쳐 날뛰자."

    서로 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이어나간다.

    "죽이고 빼앗고"
    "살리고 베풀고"
    "기만하고 거짓을 말하며"
    "위로하고 사실을 말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을 장식한다.

    ""우리는 악마. 세상을 장난감으로 삼는 존재라네.""

    노래를 끝내고, 우리는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럼, 앞으로 마음껏 즐기라고, 친구."
    "그래. 궁금한 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할게."
    "얼마든지. 그리고 아직 악마가 된지 얼마 안 된 너를 걱정하는 친구들도 남아서 조언해줄테니 걱정하지 마."
    "그거 잘되었네."
    "그치? 그럼 나는 이만."

    그는 그렇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3
  • 70 윤슬◆xhi8jXco.Y (8301718E+6)
    2018-06-15(불탄다..!) 23:04:43 <10008640>
    자자, 웃고 웃어라.

    위선자영웅들이여, 내 최후를 보고 웃어라.

    왜 그러나? 무고한 소녀마녀가 사실을 말하는 걸변명하는 걸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들이 원하는대로, 마녀가 되었다.사실을 말하고 있다

    자, 어서 죽이고 죽여라.

    불에 태워라.

    물에 빠뜨려라.

    내 뼈를 부수고, 살을 갈라 근육을 뜯어내라.

    너희들의 자손 또한 이 고통을 겪으리니.

    너희는 그 최후에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고독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이라.

    너희는 그 최후에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죽은 후에는 명예를 회복할 것이야. 죽은 후에는 그 누구보다도 으리으리한 무덤에 묻힐 것이야.

    허나 살아생전엔 비참하겠지.

    아하하!! 왜 그러나? 너희에겐 명예가 최우선 아닌가? 비록 사후지만 그 누구보다도 값진 명예를 얻는다 하지 않았나?

    대신 살아생전에는 누명에 죄악에 고문에 시달리다가 온갖 질병에 걸린 채 누더기 위에서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다가 죽겠지!!

    하지만 명예를 위해서라면 값싼 댓가 아닌가? 무려 그 누구보다도 값진 명예를, 영겁불후하게 얻는 것인데 그 정도 댓가는 감수해야지.

    이게 내 저주축복다. 무고한 소녀마녀를 잡았으니, 그 멋진 위선자영웅들에게 저주축복를 내려야 저울의 균형이 맞겠지?

    걱정마라! 내 후손은 없다!! 너희가 내 눈 앞에서 커다란 울타리 안에 가두고 늑대를 풀어주지 않았나?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복수따윈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너희 덕분에 나는 내 아이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비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기어다닌 끝에 한낱 금수인 늑대들에게 농락당하다가 찢겨죽는 것을 보았다! 아아, 내 아이들의 내장은 정말 예쁜 핑크빛이더군! 그게 늑대들이 그 주둥이로 물어뜯고 삼키는 건 정말로 끔찍했어환상적이었어!!

    아, 그러고보니 나도 너희 후손들에게 한가지 해줘야겠군.

    너희의 후손이 살아가는 땅은 황무지일 것이다.

    너희의 후손은 마시는 물은 짐승의 오물일 게야.

    너희의 후손이 걷는 길은 가시밭길일 것이며.

    너희의 후손이 누운 곳은 딱딱한 돌길이다.

    거기에 너희의 최후처럼 비참한 최후를 겪은 끝에, 많은 이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겠지.

    아니, 나처럼 불에 타죽을 수도 있겠어.

    잘난 위선자영웅나으리들과는 달리, 불명예스럽게 살면서 말이야!!

    물론, 너희들의 명예에는 티끌만치의 오물도 묻지 않을 것이니 걱정마라. 마녀가 보증하는 것이야!! 아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전부 갈기갈기 찢겨 죽어라!!

    너희에게, 너희의 마을에, 나라에, 세계에 나의 저주 있으리!!

    너희는 특히나 비참하게 죽으리라!! 그것이 나의 저주!! 나의 원망!! 나의 희망!! 나의 소원!!

    아하하핫!! 먼저 지옥에서 기다리마!! 아하하하하하하하!!
  • 4
  • 140 윤슬◆xhi8jXco.Y (8301718E+6)
    2018-06-15(불탄다..!) 23:46:52 <10010032>
    아하하, 절로 한숨 섞인 웃음이 나온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흙바닥을 적시는 빗방울. 내 몸을 적시는 빗방울처럼, 흙바닥이 천천히 젖어간다.

    그리고 거기에 퍼지는 붉은 무언가.

    "거짓말이라고 해 줘."

    어째서인지 목소리에 물기가 서린 것 같다. 비 때문일까?

    "제발."

    내 말은 허공으로 퍼져나와 곧바로 쏟아지는 빗방울에 휩쓸려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붉고, 기름기가 적게나마 섞였으며, 은은한 온기를 품은 웅덩이가 천천히 퍼져나가다가 내 발치에 닿았다.

    끈적하고, 미끌거리며 은은한 온기가 발에 전해진다.

    시야가 흐려진다.

    여동생은, 순결을 빼앗기고, 절망과 비탄에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복수는 확실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여동생이 살아오진 않는다.

    말 한마디로 산을 쪼개는 언령사이면 무엇하는가.

    말 한마디로 바다를 가르는 언령사가 뭐 어쨌다는 건가.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전력을 다해도, 어휘력을 총동원해도 무리였다.

    시간은 신조차도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그렇기에 한 순간의 선택이 중요했고.

    그걸 가볍게 여긴 나는 아주 커다란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당장, 죽어버리고 싶게 될 정도로.
  • 5
  • 891 휴대용 윤슬◆xhi8jXco.Y (5424993E+6)
    2018-06-17(내일 월요일) 22:38:50 <10053039>
    "아하하하하! 대단하구나! 대단해!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흑발 거구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청년은 그런 사내를 보며 이를 악물고,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를 죽이고, 세상을 구한다."

    청년의 말이 흡족하단 것처럼 사내가 이를 씨익 드러냈다.

    "좋다. 좋구나! 그 정도는 되어야 날 죽일 용자 아니겠는가!"

    "....."

    사내의 반응에 청년이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넌 네 부하들처럼 [인간따위가] 라거나 [감히] 같은 말은 안 하는 거야?"

    "응? 어째서?"

    사내는 오히려 자신이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꼬았다.

    "넌 인간이다. 허나 그 몸으로 강인한 마족을 꺾고 마왕이라 불리는 내 앞까지 왔지. 그 능력에 감탄하며 경의를 표하면 표했지, 깎아내리는 건 강함을 추구하는 나 자신, 그리고 내 앞까지 선 너를 향한 모욕이다."

    그 말에 청년, 용사가 피식 웃었다.

    "수하들과는 영 딴판이시구만."

    마왕이 씨익 웃었다.

    "마왕이니까."
  • 6
  • 66 역윤허◆xhi8jXco.Y (3702513E+6)
    2018-06-23(파란날) 18:41:54 <10163708>
    새카만 배경에 반짝이는 별들이 떠오르는 밤하늘.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시커먼 먹구름이 그 풍경을 가리고 굵은 빗줄기를 세차게 쏟아내었다.

    나무와 풀, 꽃들이 자란 숲에 희미하게 난 숲길을, 한 소녀가 자기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 채 걷고 있었다.

    비록 가끔씩 관리를 해줬다곤 하나 숲길. 성인 남성이라도 다니기 힘든 그 길을, 소녀는 자그마한 아이를 업고, 비가 오는 야밤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등 뒤의 아이에게선 발열로 인한 열기가 몸을 덥히고 묵직한 무게가 소녀를 괴롭혔다. 앞에선 시야를 가릴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가 몸을 두들기고 적시며 체온을 빼앗아갔다.

    소녀의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가늘고 하얀 피부의 두 다리는 쉴새없이 경련하며 비명을 질렀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거친 숨을 토했다.

    가뜩이나 흐릿한 시야는 비와 어둠에 방해를 받아 코앞도 확인하기 벅찼고, 의식은 몽롱하여 당장이라도 저 깊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든 상처투성이의 입술에 다시금 새로이 상처가 새겨졌다.

    익숙한 통증이 입술에서 전해졌다. 무척이나 익숙해져 별 감흥 없는 통증으로 애써 정신을 되찾고, 걸음을 내딛었다.

    소녀가 새로이 내딛은 발에 딱딱하고 거친 무언가가 밟혔다. 표면이 거칠고 모난 돌이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녀는 발을 들어올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발이 올라갔다가, 세차게 내려갔다.

    소녀의 발이 돌을 거세게 밟았다. 돌의 모난 모서리가 소녀의 여린 피부를 찢으며 파고 들어 속살을 괴롭혔고, 거친 표면이 발의 상처들을 쓸었다.

    발의 상처에서 시작된 통증이 신경을 타고 내달려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소녀는 이를 악물며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억눌러 삼켰다.

    격통으로 인해 잠시간 되돌아온 의식으로 저 앞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어둠 속,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물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불빛이 보였다.

    소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 83 역윤허◆xhi8jXco.Y (3702513E+6)
    2018-06-23(파란날) 18:49:31 <10163835>
    새카만 배경에 반짝이는 별들이 떠오르는 밤하늘.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시커먼 먹구름이 그 풍경을 가리고 굵은 빗줄기를 세차게 쏟아내었다.

    나무와 풀, 꽃들이 자란 숲에 희미하게 난 숲길을, 한 소녀가 자기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 채 걷고 있었다.

    비록 가끔씩 관리를 해줬다곤 하나 숲길. 성인 남성이라도 다니기 힘든 그 길을, 소녀는 자그마한 아이를 업고, 비가 오는 야밤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등 뒤의 아이에게선 발열로 인한 열기가 몸을 덥히고 묵직한 무게가 소녀를 괴롭혔다. 앞에선 시야를 가릴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가 몸을 두들기고 적시며 체온을 빼앗아갔다.

    소녀의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가늘고 하얀 피부의 두 다리는 쉴새없이 경련하며 비명을 질렀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거친 숨을 토했다.

    가뜩이나 흐릿한 시야는 비와 어둠에 방해를 받아 코앞도 확인하기 벅찼고, 의식은 몽롱하여 당장이라도 저 깊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든 상처투성이의 입술에 다시금 새로이 상처가 새겨졌다.

    익숙한 통증이 입술에서 전해졌다. 무척이나 익숙해져 별 감흥 없는 통증으로 애써 정신을 되찾고, 걸음을 내딛었다.

    소녀가 새로이 내딛은 발에 딱딱하고 거친 무언가가 밟혔다. 표면이 거칠고 모난 돌이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녀는 발을 들어올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발이 올라갔다가, 세차게 내려갔다.

    소녀의 발이 돌을 거세게 밟았다. 돌의 모난 모서리가 소녀의 여린 피부를 찢으며 파고 들어 속살을 괴롭혔고, 거친 표면이 발의 상처들을 쓸었다.

    발의 상처에서 시작된 통증이 신경을 타고 내달려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소녀는 이를 악물며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억눌러 삼켰다.

    격통으로 인해 잠시간 되돌아온 의식으로 저 앞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어둠 속,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물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불빛이 보였다.

    소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



    우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의 연구실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간만에 연구가 끝나니 기분이 좋았다.

    아아, 며칠간 푹 자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샤워를 끝내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수면모를 머리에 쓰려던 순간,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현관문으로 돌렸다.

    에? 손님? 손님?! 어째서 이 타이밍에!? 하와와와 마녀장 당황한 거시에요!!

    치, 침착해라, 나! 우선 손님이 누군지 확인부터...

    하와와와!? 나 잠옷 차림이잖아!? 아아!? 그렇다고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고....!?

    ....아, 몰랑. 이 시간에 찾아온 손님 잘못! 모든 게 손님 잘못!! 그니까 옷차림이 잠옷이어도 무례한 게 아냐!!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이르고 현관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당겼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 7
  • 11 휴대용 방콕뒹굴잉여윤슬◆xhi8jXco.Y (3338016E+5)
    2018-07-21(파란날) 22:33:45 <10668373>
    보글거리는 거품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뜬다. 방울방울 떠오르는 물거품이 보였다.

    새카만 어둠을 배경삼아 방울방울 떠오르는 모습에 눈을 깜빡인다.

    새카만 어둠이 사라지고, 햇살이 기분좋게 내리쬐는 방이 보였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손에 필기구를 쥔 채 머리를 부여잡고, 떠들고, 장난치기도 하지만 집중하기도 하던 풍경.

    시험을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기억 속 풍경. 그건 곧 물거품이 되어 떠올랐다. 떠오른 물거품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그 때의 기억이 사라져갔다.

    그게 어떤 시험이었고,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 공부로 받은 시험의 성적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모두 물거품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갔다. 내게서 떠나갔다. 사라졌다. 새카만 어둠만이 남았다.

    다시금 아래에서 위로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울방울 떠올랐다. 나는 그에 다시금 눈을 낌빡인다. 새카만 어둠 대신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변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백사장은 내달리며 뛰놀고,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는 시원한 풍경.

    하지만 하나 둘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 버다가 어디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얼마나 머물렀는지 되새길 수 없었다. 친구들의 모습도 그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모든 기억이 방울방울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 이후로 떠오른 수많은 풍경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물거품이 되어 흩어지더니 사라졌다.

    어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우던 광경이 사라지고, 어머니의 모습과 그 과정 중에 있었을 소소한 사건들을 잊었다.
8
  • 339 윤슬◆xhi8jXco.Y (6351144E+6)
    2018-08-11(파란날) 20:14:53 <11055963>
    "작은 오라버니, 거기서 비켜주세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기다려온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슬쩍 밀어올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막내의 모습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흠뻑 젖고 온갖 상처 투성이였다.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혈인 나도 비 때문에 컨디션이 잔뜩 저조해진 것을 생각하면 순혈인 막내에게 가해질 부담은 그야말로 엄청나겠지.

    사랑하는 가족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막내의 처참하고도 흉한 모습에 당장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쭉 빨며 연기와 함께 몸 속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다 타버린 담배를 버렸다.

    몸 깊은 곳까지 들어온 연기에 짙은 한탄을 뒤섞어 토해냈다.

    "어디를 가고 있는 거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에게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비켜줄 수 없어."
    "작은 오라버니!"

    막내가 잔뜩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 아이가 목소리를 높일 줄 알았구나. 조금 놀라버리는 바람에 새로 꺼낸 담배를 떨어뜨려버렸다. 땅에 떨어진 담배가 빗물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새로 담배를 꺼내고, 빈 담배곽을 구겨버렸다.

    "나보고 지금 죽으러 가는 널 그냥 놔두라는 거야?"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것 뿐이에요."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면 십중팔구 네가 죽는다고."
    "설마, 제가 제 몹 하나 못 빼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아니, 능력은 되는 거 알아. 하지만 도망칠 생각이 있었어?"

    막내는 내 반문에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오라버니."

    막내의 부름에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도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라는 이유로 저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고, 가끔은 피도 줬던 친구들이에요. 심지어 제가 도망칠 수 있게끔 싸워준 친구들이라구요!"

    불이 붙은 담배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연기와 거칠게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여동생이 무척이나 강한 각오로 빛나는 붉은 눈으로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방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도와 형과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아니었는데."

    입에 문 담배의 필터를 으직 씹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파묻혔다.

    담배를 쭉 빨았다. 담뱃불이 밝게 빛나며 순식간에 필터 앞까지 다가왔다. 담뱃불이 필터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연기가 내 몸 속을 채웠다.

    방금 전, 막내의 말을 듣고 난 후 아우성치기 시작한 감정을 연기로 침묵시켜버리고, 머릿속을 빼곡히 매운 생각을 연기에 실어 토해냈다.

    필터만 남은 담배를 던져버리고, 연기를 다 뱉어냈다.

    "재주껏 넘어가보렴."

    생각과 마음을 텅 비워버린 내 말에, 그 아이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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